Rhythm Is It by 스밀라

영화명

Rhythm Is It

등장인물

사이먼 래틀, 로이스턴 말둠,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봄의 제전무용수 등

장르/제작연도

다큐멘터리, 2006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변할 수 있다고 믿고 산다.더 나은 방향으로 우리 자신이, 혹은 누군가가 변화하리라는 믿음이야말로 모든 교육의출발점이고 우리가 미래에 거는 가장 큰 기대다. 자신이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음을 느끼는 순간,그 사람은 비로소 자기 미래에 대해 책임감을 갖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극빈층 이주민 가정 아이들을 만난 학교 교사들 역시 이 같은 신념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베를린오케스트라가연주하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에 맞춰 대규모의 아마추어 학생댄서들이 춤을 춘다는 어찌 보면 무모한 교육 프로젝트를 감행했다.

2003 1,독일 베를린에 사는 250명의 청소년들은 출신국적도 성장배경도 서로 다르다.그리고 그들 중 상당 수는 불우한 망명가정의 아이들로, 삶을 냉소하는 태도를 먼저 배웠다. 자신들의 삶의 잠재력에 무관심한 그들은 게으른 생활과 자기비하에더 익숙하다. 그러나 지난 30여 년 간 소외지역을 찾아 다니며 무용프로젝트를진행해온 안무가 로이스턴 말둠(Royston Maldoom)은 누구도 선뜻 나서기 어려운 이 일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다. 아이들에게 침묵과 맞서 몸의언어를 터득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말이 아닌 몸으로 표현하는 형태의 소통이 가진 치유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대부분의 학생들은 춤을 배워보기는커녕,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말에 귀기울이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이다. 이들은 무용실에서도 어색한 나머지 공연히 소음을 내고,두려움을 감추려고 잡담을 한다. , 그들을짓누르는 어려운 순간을 모면하려고 웃고 떠드는 행동을 택하는 것이다. 게다가 처음 배우는 동작들을 따라하기엔굳어있는 그들의 몸은 어색하기만 하다.

몸의 언어로 대화하고 표현하는 것의 어려움은 비단 베를린에 사는 이주민학생들에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청소년들과 젊은이들 역시 무작정 음악에 몸을 맡기고 전신거울을마주해야 한다면 그 같은 두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입시위주의 고등교육에서 스포츠와 무용, 음악과 미술 같은 것들은 우선순위에서 저만치 밀려나버렸고, 우리는 무용과 음악을 감상할 줄은알아도 할 줄은 모르는 반쪽 짜리 예술인으로 남았다.

그러나 나는 느낀다. 때때로 내 온 몸을 전율하게 하는 리듬을 만날 때,내 몸 구석구석이 조금씩 깨어나는 것을. 마구 흔들고 기울이고 서로 맞부딪치고 달리고싶어하는 팔과 다리, 허리와 엉덩이를 나는 느낀다. 영화 속 무용수의확신에 찬 고백처럼, 의식하지 못할 때에도 몸은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드러낸다. 즉 내적 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내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춤을 배우는 것은 우리가 보다 능동적으로우리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방법을 익히고, 활용할 줄 알게 됨을 의미한다. 세상과 내가 소통하는 또 하나의 매체를 획득하는 셈이다

입과 귀가 서로 호응하면서 생겨나는 온갖 잡음들과 이런저런 소음이 사라지고 나면, 우리 몸의 다른 감각들이 깨어나고, 딱 그 만큼 변화의 가능성도 열린다. 베를린의 학생들도 스트라빈스키의 선율에 진지하게 몰입하기 시작한다. 몇몇 학생들이 프로 무용단의연습실을 견학하고 돌아와 낮게 내뱉은 한마디, “저것이 열정이다라는말처럼, 그들은 열정을 배우기 시작한다.

춤의 힘에 대해 역설하는 말둠의 상기된 표정은 음악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이며, 음악이 인간을 변화시키는가에 대해 힘주어 말하는 사이먼 래틀의 목소리와 자연스레 연결된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사이먼 래틀은 인간의 뇌에는 진화가 덜 된 부분이 있다면서, 그것은 바로 리듬을 느끼는 부분이라고 말한다. 어린시절 우리가 어떤 강렬한 리듬을 접하게 되면이는 태고적 존재하던 원시적 존재와 교감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덧붙인다. 아마도 이는 음악의 세계에 심취해결국 지휘자가 된 그 자신의 체험이기도 할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음악은 단순히 음악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이자 소통수단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확신의 찬 사람들의 품에 안긴 아이들, 그들은 어떤 고민과 역사를 갖고 있을까. 시종일관 카메라에 비춰지는 황량한 거리풍경과 도시생활.베를린은 아직 통일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망명문제와 실업,빈곤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예술이 그 자리에 비집고 서기에는 아스팔트 틈 사이에난 민들레 꽃처럼 위태로운 상태다. 이런 곳에 살고 있는 아이들 역시 어딜 가든 친구와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고하고, 학교 말고는 딱히 마음 붙일 곳도, 자신들을 돌보아줄 것도 없다.그들 중 마틴은 접촉을 싫어하는 남자아이다.그는 사람들 간의 접촉이 지나치게 친밀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모르는 사람과는 악수조차하기 싫다며, 낯선 사람 앞에서는 억지로 미소짓기 보다는 오히려 얼굴을 찡그려 방어태세를 취한다.스스로를 모든 면에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평가하는 마틴. 마틴은 자신에게 주어진 안무 중에 친구의 어깨 위에 올라타 손을 뻗는 동작이포함되어 있자, 부담스러운 나머지 무용수업을 그만둘 것을 고민한다. 하지만 영화가 전개되면서 우리는 그런 그가 두려움과 거부감을 억누르고 계속해서 춤을 배우러 오는 것을 보게 되는데,‘스스로를 위해 춤을 계속 추겠다는 그의 담담한 어조에서 우리는 틀을 깨고 나오려는희미한 성장의 몸짓을 읽게 된다. 작위적이라고 폄하될 수도 있겠지만 공연이 끝날 무렵, “어떤 길이 될지 모르지만 희망을 갖게 됐다.”는 그의 밝은 얼굴 앞에서 그 어느 누가 희망을보지 못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겨우 몇 달간의 무용수업을 통해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메시지라면 받아들이기 거북하다는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 이러한 예술교육 프로젝트가 실행되는 과정을 관찰자적 입장에서 바라보다보면, 어쩌면 결국 이 다큐멘터리는 선택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우리에게는 불가항력적인 일,원인이나 결과를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도 많이 일어나 종종 무기력해지는데, 그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능동적인 행위는 그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고,포용하고, 기억할 것인가, 라는 선택의 문제다.‘무용수업을 통해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말은 결국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사실이나결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꿈에 무게중심이 실려있는 미래형 문장인 것이다. 지휘자 사이먼래틀은 유사한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한다.

삶에는 훈육이 필요하다. 훈육을 통해 무언가를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만이 미래가 있다. 더 집중하라. 배우는 그 순간에최선을 다하라. 뭔가 이루려면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처음 접하는 무용에서 잘 되지 않는 동작을 수십 번 연습하고, 수많은 다른 무용수들과 합을 맞추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고, 마침내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 간의노력을 평가 받는 일련의 무용프로젝트를 통해서, ‘자기비하게으름에 익숙해져 있던 학생들은 삶을 살아가는 완전히 새로운 태도를 습득한다.난생 처음으로, 누군가의 적극적인 지지와 이끎을 통해 그들은 훈육의 과정을 제대로경험하고, 그들의 잠재력을 펼쳐 보일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이다.

무용을 매개로 한 예술교육 프로젝트에 관한 이 영화는 올해 국내에서 개봉했던 다큐멘터리 피나바우쉬의 댄싱드림즈(Tanztraume)’와도 맥이 닿는다. 200968세의 나이로 죽음을맞이하기까지 춤, 연극, 노래, 미술의 경계를 허문 무용극 탄츠 테아터(Tanzetheater)’를 창시하고 현대무용의 전설이 된 안무가 피나 바우쉬 역시 무용을 배워 본 적 없는 평범한 10대 청소년들과 열 달 동안의 연습과정을 거쳐 그녀의 대표작 콘탁토프(Kontakthof)’를 무대에 올렸다. 그 과정을 담은 것이 영화 댄싱드림즈. 첫사랑을 통해 온몸으로 경험하게 되는 긴장과 불안, 설렘과 부끄러움, 두려움과 환희 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그리는 콘탁토프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피나파우쉬의 모습은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게 아니다.무엇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지에 관심이 있다.’ 는 그녀의 유명한 말을 떠올리게한다. 베를린에서 봄의 제전에 몸을 내맡긴 아이들이 그러했듯, 피나바우쉬의 어린 학생들 역시 무용을 통해 자신들의 삶을돌아보고 감정을 표현하며,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

스트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원시사회희생제물을 통한 구원을 담은 음악이다. 한 여성이 희생제물이 되어 봄이 올 때까지 춤을 추고,그녀의 희생으로 대지에 다시 봄이 찾아온다. 예술교육 프로젝트를 위해 봄의 제전을 선택하면서, 사이먼 래틀과 로이스턴 말둠,그리고 무용교사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가 재가 되어 사라지면 저들이 불이되어 타오르기 시작해요.”라는 말이 남긴 단서처럼, 그들은 그들이 살아가는공동체를 위해 다른 사람과 그들의 재능과 영혼을 나눌 줄 아는 진짜 예술가였다. 황폐화된 도시 베를린에서예술의 생존을 위해 싸우면서, 예술은 우리에게 사치가 아닌 공기와 물 같은 것임을 증명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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